연세의대 학장을 지낸 허갑범 박사는 알아주는 의학전문대학원 찬성론자로 어느 자리에서건 틈나는 대로 의전원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한다.
그의 논거는 ‘의사들을 진료만 하게 길러서는 의료계의 미래도 없다’는 것. 학부에서 다양한 전공을 마친 우수한 인재들이 의사가 되어 다양한 관련 분야로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말끝에 허 박사는 꼭 그런 경우에 부합될 제자 몇 명을 예로 들곤 하는데, 복지부의 김연아 사무관은 이 경우 언제나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김 사무관은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복수전공의 기회를 얻어 의대 본과에 편입된 경우이다. 경쟁이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관문을 통과했다. 이렇게만 보면 의학전문대학원과 다르지 않은 과정이다. 수료 후 받게 되는 학위가 다를 뿐 김 사무관의 경우는 당시로선 ‘미리 가 본 의전원’과 다를 것이 없다.

그리고 4년 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됐다. 감염내과를 전공한 후엔 당당히 진료실을 박차고 나와 한 나라의 보건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공무원이 되고만 것이다. 허 박사가 말하는 김연아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학부에서 전공 과정을 마친 연후여서 ‘무엇이 되어야 겠다’ ‘무엇이 하고 싶다’는 뚜렷한 생각을 갖고 의학공부에 임할 수 있었다는 것. 이 부문에서 김 사무관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까?

“복수 전공은 개인적으론 아주 좋은 기회였어요. 하지만 의학전문대학원은 좀 더 생각해 볼 문제 같아요. 학부를 졸업하고 다시 의전원에 진학해 의사가 되자면 사실 너무 긴 시간이거든요. 반면 의전원 같은 4+4 제도가 필요한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테고요.”
 
◆문학과 마친 후 본과 편입
 
영어를 전공한 이력 탓이기도 하겠지만, 허갑범 박사의 설명처럼 김연아 사무관은 의대에 적을 두면서부터 국제기구 근무를 꿈꾸었다. 이런 진로의 구체화는 자연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갖게 했고, 김 사무관은 본과 2학년 때 제네바에서 6주 과정의 WHO 인턴십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종욱 총장님도 그 때 처음 뵈었어요. 개인적으로 친해져서 자주 조언을 구했고, 늘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격려해 주셨죠. 귀국해서도 줄곧 연락을 이어와 전공을 선택할 때도 국제기구에서 일하려면 감염 내과를 전공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해 주셨어요. 좋은 인연이라 생각했었는데...” 
“의대 시절에는 어땠나요? 급우들보다 나이가 좀 많았을 텐데...?”
“다들 누나로 대접을 해줘서 너무 행복하게 생활했어요. 대신 공부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죠 뭐. 그래도 혼자 하는 공부가 아니라서 따라가기는 했나 봐요. 썩 잘하지는 못했어도 상위권은 유지한 것 같아요.”
“전공을 마치고 복지부에 들어올 때는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이런 저런 분야에 잡다하게 관심을 보이다 보니 주위 분들이 많은 정보를 주세요. 감염내과 펠로우 시절 기회가 돼 정부와 관련 되는 일을 해보려고 질병관리본부 고문관에 지원했었죠. 그러다 보건복지부 특채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는데, 덜컥 합격을 하고 만거죠. 작년 8월에 합격 통지를 받았고, 당시 제가 출산이 임박해 있어서 미뤘다가 지난 1월 1일자로 보건정책팀에 발령을 받았어요. 지금 자리는 1명을 뽑는데 7명이 지원했으니 경쟁이 셌던 편이지요.”

그는 복지부 사무관이 됐다고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곧 바로 국제기구 근무와 연관시키는 바람에 무척 당황스러웠다고 털어놨다. 그리곤 설명을 덧붙이길 ‘인생에 대해 많이 오픈해 생각하는 편이어서 목표가 있더라도 상황에 따라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을 것’이란다.
그러므로 어떤 자리 어떤 직위가 목표가 될 수는 없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 안에서 연륜에 맞게 성취를 쌓아 가는 것이 그에겐 중요하단다. 

◆국가공무원으로서의 직무에 만족
 
“그래서요? 지금이 만족스러운가요? 혹 기대치와 차이가 있거나 하진 않나요?”
“무척 좋아요. 병원에서야 의사는 한 사람을 위해 진료하지만 여기서는 제가 하는 일이 전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잖아요. 근무 기간이 짧아 아직 느낄 기회도 없었지만, 이런 보람이 어딘데 싶어요. 경제적으로야 동기생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더라도 다른 면에서 얻는 것이 있어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하는 일은 어떤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설명해 주시죠.”
“영양이나 운동, 비만 같은 예방 차원의 국민건강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각 부문에서 예산을 따내 학교나 보건소를 통해 실행을 시키는 일이에요. 업무 강도는 센 편입니다. 모르는 분들이 ‘공무원이니까 칼 퇴근이겠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출장이나 회의도 잦아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아요.”
“보건 사무관직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뽑나요? 정기적인 모집 시기가 있나요?”
“그렇지 않아요. 필요할 때 특채 공고를 통해 필요한 만큼 뽑아 쓰는 식이에요. 통상 1년에 1번 이상은 기회가 있어요. 자격은 특별한 요건이 있는 건 아니고...”

김연아 사무관은 보기보다 체력이 좋은 사람이다. 지금은 애기 땜에 그럴 수 없지만, 수영과 골프 테니스를 즐겼고, 운동은 다 좋아한다. 14년간 연애를 이어온 남편과는 레지던트 4년차 때 결혼을 했고, 이촌동에서 과천까지 승용차로 출퇴근을 한다.

그는 스스로에게도 늘 긍정적이다. 자신은 굉장히 운이 좋아서 좋은 부모 좋은 친구 좋은 스승을 갖게 됐고, 이런 자산들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때 마다 큰 힘이 돼 주었단다. 후배들에게도 생각을 열어두길 당부하면서 ‘의대를 졸업했으니 의사이겠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으면’ 하고 당부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세요. 보건 사무관 다음엔 뭐가 되고 싶으세요?”
“하하.., 다음에 뭘 할 건지 많이들 물어 오시지만 그 때 제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제 자신이 오히려 궁금해요. 제 목표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목표를 직책과 직위에 두진 않을 생각인데, 가능하면 제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주려고 늘 마음을 열려고 노력합니다.”

김연아 사무관은 일요일에는 라파엘 클리닉에 나가 외국인 근로자들을 위한 진료봉사에 참여한다. 원래 김 사무관이 꿈꾸었던 의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는 의사 였으므로 이런 작은 부분에서나마 의사로서의 만족감을 느끼고 싶단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고 싶어요. 욕심이지만, 내가 만든 정책이 사람들이 보다 좋은 삶을 영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거죠.” 김연아 사무관가 인터뷰 말미에 가서야 겨우 국가공무원다운 각오를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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