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지인 등과 감정 나누는 소통 중요

▲ 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제춘 교수
‘헬조선’, ‘금수저·흙수저’, ‘개한민국’, ‘오포세대’ 등 현실을 냉소적인 시각으로 표현한 신조어들이 우리 세대에 만연해 있고, 사회는 우리에게 안정감과 만족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불안정한 사회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병을 앓지만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별일 아닌 듯 지나치기 쉬우나 심하면 고혈압이나 중풍 등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는 화병과 우울증에 대해 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유제춘 교수의 도움말로 알아본다.

화병, 신체 증상을 동반한 우울증
울화병이라고도 불리는 화병(火病)은 신체 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으로, 미국신경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에 대한 진단기준인 DSM-IV 부록에도 실린 공식 병명이다. 화병은 예전에는 표현이 자유롭지 못하던 중년 여성에게 흔하다고 알려졌으나 최근 암담한 현실로 인해 남녀노소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증상을 토로한다. 또한 일조시간이 짧아지며 나타나는 호르몬의 변화 역시 최근 집단 우울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화병은 우울감, 불면, 식욕 저하, 의욕상실, 피로 등의 우울 증상 외에도 특징적인 신체 증상이 동반돼 나타난다.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기도 하며, 숨 쉬는 것이 답답하고 가슴이 뛰는 증상이 생기기도 한다. 또 소화가 잘 안 되거나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을 느끼기도 하고, 몸 여기저기에 통증이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우울감이 심해지면 자살에 대한 생각이 증가해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게 될 위험이 증가할 수 있다.

화병의 원인은 일반적인 우울증과 비슷하게 스트레스가 주요 원인이며, 갈등으로 인한 가정적 요인을 비롯해 가난이나 실패, 좌절 등 외부적인 요인도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다. 특히 최근 불거진 사회적 이슈들과 사회 기득권의 행실에 대한 분노, 배신감 등의 감정은 많은 사람들에게 박탈감과 무기력증, 우울증 등 화병 증상을 유발했다. 또한 개인의 성격적인 특성상 속상함, 억울함, 분함 등의 감정을 쉽게 풀어내지 못하고 담아두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특히 위계질서를 미덕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고 윗사람에게 다가가기 어려워 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피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이나 가족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환경에 순응하고 살던 사람들이 갑작스런 일들로 당혹감과 실망, 분노, 불만의 감정이 동시에 나타나 결국 신체증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우울증과 비슷한 정서변화에 신체적 증상 더해져
화병은 우울증 증상과 같이 일차적으로 정신적인 증상이 나타난다. 환자 대부분이 사소한 일에도 짜증과 신경질을 내는 등 예민한 상태가 지속되고, 분노와 화를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억울함과 분한 감정을 자주 느끼며 공격적인 성향이 매우 강해진다. 이 외에도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불면증을 겪게 되기도 하고, 이유 없는 한숨이 늘고 우울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신체적인 증상으로는 온 몸에 열이 나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목이나 가슴이 조여와 답답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간혹 속이 쓰리며 메스꺼움을 느끼고, 이로 인해 식욕 장애나 소화 장애를 겪기도 한다. 심하게는 만성적인 분노로 인한 고혈압이나 중풍 등의 심혈관계 질환의 발병 혹은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이러한 신체적인 증상은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의 흥분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이 지나치게 많이 분비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 정신적인 증상, 즉 마음의 불편이 신체적인 증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화병으로 인한 증상이 건강에 대한 염려를 하게 만들고, 이 때문에 불안을 느끼다 보면 더욱 악화될 수 있어 총체적인 악순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유제춘 교수는 “우울감 등 정신적인 증상과 두통, 소화불량, 전신통증 등 신체적인 증상이 2주 이상 동반됐다면 전문의를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소통과 감정교류, 화병 예방에 효과적
일반적인 화병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방법을 익혀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어주어야 한다. 또 화가 난다고 해서 그 즉시 화를 낸다면 더욱 악화된다. 마치 불발탄을 해체하듯이 천천히 침착하게 화를 다스리며 풀어야 한다.

스트레스 해소 또한 화병 예방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스트레스로 인해 몸과 마음이 경직된 채 수면을 취하면 화병 뿐 아니라 인체의 모든 면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날 받은 스트레스는 그날 해소할 수 있도록 운동이나 음악 감상 등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을 만드는 것도 도움이 된다.

조깅, 수영, 자전거타기 등의 유산소 운동은 몸에 건강을 돌려줄 뿐더러,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데도 최상의 방법이다. 1주에 세 번 이상, 적어도 땀이 약간 밸 정도의 강도로 운동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직장생활로 여유가 없다면 점심시간을 활용해 직장 주변 공원이라도 산책하도록 한다. 또한 규칙적인 수면과 균형 잡힌 식사는 필수, 과도한 음주와 흡연을 피하는 것도 중요하다.

유제춘 교수는 “최근 화병이라고 진단받을 수 있는 환자들의 유형을 살펴보면, 취업이나 진로 혹은 조기 실직, 정년퇴직, 경제적 어려움, 자녀 문제 등 다양한 원인으로 자기 회의감, 무력감, 상실감, 분노 등의 감정을 갑작스럽게 느끼며 화병의 증상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때문에 문제를 혼자서 안고 고민하기보다는 공감해 줄 수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과 소통하고 느끼는 감정을 나누는 것이 우울감을 예방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또한 질환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가벼운 증상으로 소홀하게 여기는 경우가 많으므로, 우울감과 상실감, 분노 등의 감정이 커져 주변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등 일상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경우에는 빠른 시일 내에 전문의를 찾아 상담하고 정확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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